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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의례 시행과 개정 논의

Discussion on the Enforcement and Revision of the Kukcho oryeŭi

한국학 / Korean Studies Quarterly, (P)2671-8197; (E)2733-936X
2017, v.40 no.2, pp.39-69
https://doi.org/10.25024/ksq.40.2.201706.39
박수정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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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국조오례의』는 1474년(성종 5)에 편찬되었다. 하지만 약 3세기 동안 예제의 전형으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국조오례의』에도 변화의 요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270년이 지난 1744년(영조 20)에 『국조오례의』의 후속편에 해당하는 『국조속오례의』의 편찬이 이루어진 것인데, 새로운 의례서의 등장은 단순한 의례 절차의 변화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국가례는 오례, 사대부례는 주자가례의 적용을 받으며 이원적 체제로 운영되어오던 조선의 의례는 국가의 이념과 사상에 따른 변화를 함께 겪게 된다. 곧 주자성리학의 이해와 실천에 따라 의례의 적용 범위와 대상을 두고 일어난 오례의와 주자가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오례의와 주자가례 시행의 충돌을 다음 세 가지 쟁점 위주로 검토해보았다. 첫째, 복제문제는 서인(庶人)의 3년상 문제, 1567년 명종 상(喪)에서의 흑립·백립 문제, 1575년 인순왕후 상과 1577년 인성왕후 상에서의 오사모·흑각대와 백의관대의 착용문제로 세분화하여 살폈다. 사림들이 주장해오던 서인(庶人)들의 3년상제는 영조 대에 가서야 확립되었고, 졸곡 후 관리들이 집무할 때의 차림이 백모·백대로 정해지면서 흑립·백립 문제에도 주자가례의 적용이 이루어졌다. 둘째, 친영례 시행문제를 살펴보면, 왕은 ‘명사봉영(命使奉迎)’이라 하여 신하가 왕비를 맞이해오고 있었다. 정광필 등은 친영의 예를 반대하였지만, 사림들의 주장에 따라 결국은 1517년(중종 12) 문정왕후를 맞이할 때, 국왕의 친영례가 시행되었다. 중종 대와 선종 대의 시행을 거친 이 친영의례는 영조 대에 가서야 『속오례의』에 「납비친영의」라는 정식 의례로 실린다. 셋째, 16세기 천릉에는 1513년의 소릉(昭陵), 1537년의 희릉(禧陵), 1562년의 정릉(靖陵) 천릉이 있다. 소릉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인데, 세조가 왕위 찬탈과 함께 종묘에서 폐출시켰던 것을 중종이 복위시키면서 천릉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림들이 의리와 명분을 앞세워 요구해온 일이 실현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희릉 천릉은 권신 김안로가 훈구세력인 정광필을 제거하려는 술수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은 이 천릉을 통해 중종이 정권을 장악한 척신 김안로의 전횡을 처단하였으며, 정릉 천릉은 명종이 친정체제의 구축을 통해 왕권 확립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훈척신과 사림파의 갈등구조를 17세기의 영릉(寧陵) 천릉까지 확장해보면, 의례를 명목으로 한 정치적 대립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국조오례의』 개정 논란을 다루었다. 17세기 초반 침류대시사(枕流臺詩社) 활동을 통한 진한고문파와 당송고문파의 인적 구분을 예학에도 적용해보면, 진한고문파는 남인 또는 서인의 소론으로 연결되고, 당송고문파는 서인 또는 서인의 노론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인과 서인의 대결 구도는 17세기 예송문제라는 큰 정치적 사건으로 이어지며,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이므로 이 분열을 야기한 『국조오례의』의 개정 논의를 살펴본 것이다. 조선 후기 의례서 편찬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구도는 『국조오례의』 개정에서 다루어지는 학파(學派)·정파(政派)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그 연원을 찾을수 있다.

keywords
The Ceremonies of the Five Rites, Kukcho oryeŭi, Master Chu’s Family Rituals, Chimnyudae Sisa, the literature from the Qin and Han dynasties, the literature of the Tang and Song dynasties, powerful official, Old Meritorious Faction, School of Neo-Confucian literati, School of the Southerners, School of the Westerner, the Old Doctrine faction, the Young Doctrine, Chŏng-gu, Yi Chŏngku, Kim Changsaeng, Kim Chip, 오례의, 『국조오례의』, 주자가례, 침류대시사, 진한고문파, 당송고문파, 권신, 훈구파, 사림학파, 남인, 서인, 노론, 소론, 정구, 이정구, 김장생, 김집, 五禮儀, 『國朝五禮儀』, 朱子家禮, 枕流臺詩社, 權臣, 勳舊派, 士林學派, 南人, 西人, 老論, 少論, 鄭球, 李廷龜, 金長生, 金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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