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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과 친일 사이: 윤치호의 3·1 운동 인식과 대응

Between Bystander and Collaborator: Yun Chi-ho’s Perception and Response to the March 1st Movement

한국학 / Korean Studies Quarterly, (P)2671-8197; (E)2733-936X
2018, v.41 no.4, pp.7-37
https://doi.org/10.25024/ksq.41.4.201812.7
노상균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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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고에서는 『윤치호일기』를 중심으로 윤치호가 바라본 3·1 운동과 그에 대한 평가 및 대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3·1 운동에 대한 평가를 놓고 윤치호는 매우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3·1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의 분노와 독립의지에 공감하기보다는 그와 거리를 두고 어떻게든 3·1 운동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들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조선 민중에 대한 그의 불신감이 너무 뿌리 깊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는 3·1 운동을 리스크 없이 자신의 불만을 개진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하지만 그의 개혁구상은 자치제에 대한 요구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대다수의 민중의 바람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전유하고 싶은 것은 3·1 운동이 가져다준 기회이지 그 정신은 아니었던 것이다. 3·1 운동에 대한 그의 평가와 대응은 조선사회로부터 냉담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그는 깊은 상실감과 정신적 압박을 느꼈으며, 자신의 생각을 일부 바꿈으로써 심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사상변화의 방향이란 기독교를 이용한 탈정치의 기치로 민중의 정치적인 요구를 외면하고,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통해 강압적으로 민중을 계도할 수 있도록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정신적인 압박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민중과의 거리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3·1 운동을 통해 윤치호는 민중으로부터 기대 받던 사회적 신망도 잃고, 사상적으로도 더욱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keywords
윤치호(Yun Chi‒ho), 3·1 운동(March 1st Movement), 자유(freedom), 기본권(basic human rights), 재산권(property Rights), 기독교(Christianity), 자치제(self‒governing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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