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738-3188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진영을 막론하고 맞서 싸워야 할 ‘적(敵)’의 형상은 분명했다. 그러나 1990년대, 형식적 민주화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동시에 적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고통은 존재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으로 상정될 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바로 이러한 현실 위에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처했던 근본적인 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여기에서 지속되는 불가해한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당대 한국에서는 ‘음모론’의 상상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의 맥락에서 음모론의 이야기들은 사라진 1980년대적 거대서사를 대리보충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야기의 ‘아노미’ 속에서 음모론적 상상력은 다원화된 1990년대식 적대의 구조를 우회하며 집단적 적의 형태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선형적이고 이분법적인 해석틀을 제공했다. 본고는 1990년대 발흥한 일련의 ‘음모론 소설’들이 동시기 현실과 조응하는 1990년대 문학의 한 양상으로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음모론이라는 틀을 통해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을 포괄한 1990년대 한국문학 장 전체에 대한 하나의 인지적 지도를 그려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2장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1993), 그리고 이명행의 <황색새의 발톱>(1993)을 통해 대중문학 장에서 펼쳐진 음모론적 상상력이 야기한 주체의 독특한 행위성과 그 뒤편에 놓인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조명하였다. 3장은 작가세계 신인상 2・3회 수상작인 장태일의 <49일의 남자>(1993)와 김연수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1994)를 통해 음모론적 상상력을 활용하고자 했던 당시 문단의 상업적 욕망과 더불어, 그러한 상상력이 후일담과 메타픽션이라는 순수문학의 관습적 외피 속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한계를 확인하였다. 4장에서는 송경아의 <유괴>(1994), <송어와 은어>(1994) 그리고 듀나의 <스핑크스 아래서>(1998), <꼭두각시들>(2000)을 통해 PC통신이라는 새로운 영토에서 음모론적 상상력이 마치 하나의 비판적 서사 기법처럼 사용되며, 음모의 중핵에 놓인 적의 형상이 소설 밖 작가, 성소수자, 그리고 텅 빈 공허로 대체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