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ISSN 2671-8197
- E-ISSN 2733-936X
본문에서는 임진전쟁기 명 황제의 조서와 칙서를 영접하는 의례와 문서를 전달하는 사신을 조선에서 접대하는 의례 양상을 분석하여 외교 의례 시스템 속에서 양국 관계를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임진전쟁기는 선조의 몽진과 궁궐의 화재로 인해 외교 의례 공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 의례의 장소는 왕이 이어(移御)한 행재소나 시어소에서 진행되었고, 태평관도 그 규모가 축소되어 연례도 온전하게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조가 1592년 4월 30일 도성을 떠나 1593년 10월 환도하기 전까지 거의 1년 6개월을 개성, 평양, 숙천, 안주, 영변, 의주 등 서북로 행재소에서 이어하였다. 그중 의주에서 6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18일 회환까지 약 7개월을 체류하며 의주부 용만관 취승당을 왕의 행재소로 삼았고, 의순관을 명사의 임시관소로 마련하여 영접하였다. 환도 후에는 궁실이 소실되어 황화방 정릉동에 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시어소로 삼았기에 기존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펼쳐지던 때와 달리 영·조칙례도 변통을 둘 수밖에 없었다. 임진전쟁기 명나라에서는 한림원 출신보다는 전쟁 시를 감안하여 주로 행인사 행인 출신의 관원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1592년 6월 명군을 조선에 보내 구원한다는 조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설번과 1593년 10월 선조가 환도한 것에 대해 위로하는 칙서를 가져온 행인사 행인 사헌의 사례이다. 또한 병부주사, 요동도사 및 차관을 파견하거나 명에 사행 갔던 조선 사신이 외교문서를 재래해 오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당시는 물력이 고갈되어 평양 이서에 원접사가 없어 사신 접대가 대부분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진전쟁기에는 모화관 영조의식에서 공용경이 1537년 사신으로 왔을 때 새로 추가하게 한 국왕이 용정 앞에서 행하는 오배삼고두례와 1582년 정전에서 행하는 영조의식에서 추가된 조서 선포 시에 국왕이 친히 향을 세 번 올리는 의주가 더욱 고착화된다. 명이 일본과 강화를 추진하면서 1593년 명에서 파견한 강화사 사용재와 서일관이 왜성에 억류된 임해군과 순화군을 송환하게 하였고, 1594년 4월 만력제가 일본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기 위한 봉왜책사로 이종성과 양방형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때 선조는 봉왜책사가 가져온 황제 의장인 용절을 영조문에 나가 맞이하였다. 강화가 장기화되고 책봉사절의 조선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이 거느린 8백여 명의 병사와 마필을 먹이는 문제도 조선에 적지 않은 재정 부담을 주었다. 더구나 책봉 정사가 왜영에서 탈출해 오거나 조선의 근수배신을 동행시키는 등 매우 이례적 상황 속에 외교의례 논의와 조정의 대처가 사안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강화협상이 무산되고 정유재란이 발발한 후 선조는 요동도사의 차관이 가져온 칙서에 대해서도 명사와 동일하게 외교의례를 진행하였다. 이후 1599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군이 퇴각한 후 사은사 한응인을 통해 만력제가 칙서와 함께 망의와 채단 등 예물을 내리자 이에 대한 사은 망궐례와 영칙례를 시어소에서 행하였다. 1599년 7월 왕세자 광해군의 경우 명에서 책봉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배표례와 등황조서를 맞을 때 의례에 참여시키지 않았는데, 이전 전란 중에는 왕세자를 외교 의례에 참여시켰던 것과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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