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ISSN 2671-8197
- E-ISSN 2733-936X
이 글에서는 8세기 신라의 발해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 배경을 살펴보았다. 8세기 전반 신라는 발해를 번국(藩國)이자, 북적(北狄)으로 인식했다. 신라의 인식과 별개로 발해는 713년 당과 국교를 맺었다. 발해는 밖으로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이어나갔으며 말갈에 대한 정복을 단행하였다. 안으로는 연호를 사용하는 등 신라가 인식하는 번국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이어나갔다. 732년 발해・당 전쟁이 일어났다. 733년 당은 신라에 참전을 요구했다. 신라가 전쟁에 참여한 데는 패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으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발해를 토벌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당이 755년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발해 문왕은 이를 계기로 책봉호가 진봉되었을 뿐 아니라 그 위상도 높아졌다. 더구나 연호를 쓰며 황제체제를 지향하는 등 자주적 노선을 견지해 나갔다. 신라도 친당의존적인 흐름 한편에서 점차 대당자립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원성왕 대 신라는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재인식하고 사신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신라 내부에 차등적인 국제질서에 입각한 대발해 번국관이 이어지면서도, 한편에서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이웃나라’라는 인식이 하나의 흐름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변화에는 당이 혼란에 빠지면서 신라・당관계의 변화가 모색되었고, 신라도 발해와 직・간접적으로교류함으로써 발해의 위상을 확인하고 자주성에 대한 자극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