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738-3188
이 글은 의철학자 하비 카렐의 『아픔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Illness, Oxford University Press, 2016)을 중심으로, 팬데믹 이후 몸과 질병을 재사유하며 ‘아픔’을 존재론적 경험이자 서사적 정의의 계기로 모색한다. 코로나19는 감염과 방역의 과정에서 환자와 감염자를 격리하고 데이터화함으로써 질병 중심적 시선과 생명정치적 통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 질병(disease)은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환원될 뿐이며, 개인이 체험한 불안, 고립, 관계의 단절과 같은 아픔(illness)의 차원은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했다. 본고는 바로 이 간극을 출발점으로 삼아, 아픔이 인간 존재의 조건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현상학적 질문에 주목한다. 의료 체계의 관점에서 질병이 생물학적 기능 부전으로서 주로 3인칭 객관적 언어로 서술된다면, 아픔은 1인칭 시점에서 체험되는 세계-내-존재 방식의 변화로 이해된다. ‘신체적 의심’과 ‘체현된 에포케’(embodied epoché)에 대한 카렐의 논의는 아픔을 황폐화나 결핍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재검토하게 하는 인식론적 전환의 계기를 제시한다. 또한 카렐은 ‘메디컬 툴킷’(medical toolkit)과 인식론적 정의를 통해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증언의 배제와 비인간화를 비판하고,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명명하고 서사화할 권리를 복원하는 실천을 제안한다. 나아가 본고는 카렐의 의철학적 논의에 생명정치 비판과 존재론적 정치철학의 논의를 접목함으로써, 모든 몸이 본래적으로 타자와 환경에 노출된 존재이며 상호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여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 글은 아픈 몸의 현상학이 의학과 철학, 인문학의 교차로에서 어떻게 이야기의 힘과 윤리를 부각시키는지에 주목한다. 모든 몸은 애초에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들은 신체를 통해 생생하게 발화된다. 결론적으로 아픔은 예외적 비극이 아니라 공동체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비평적 계기이기에,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는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몸의 서사적 정의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